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해 제국 (문단 편집) ==== 노르웨이 정복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nut-north-sea-empire.png|height=28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67_1979B-Egbert-mort-chest-1.webp|height=280]]}}} || || '''{{{#40E0D0 북해 제국의 영향권}}}'''[* 진한 붉은색은 본토, 주황색은 속국, 노란색은 동맹국이다.] || '''{{{#40E0D0 [[웨스트민스터 사원|{{{#40E0D0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위치한 크누트 대왕의 무덤}}}''' || 크누트 대왕이 한 차례 노르웨이 군대를 덴마크에서 내쫒았지만 아직 [[올라프 2세]]는 크누트 대왕에 대한 적개심을 버리지 않은 상태였다. 사실 올라프 2세와 크누트 대왕의 악연은 꽤나 뿌리가 깊은 것이어서, 그 옛날 크누트가 잉글랜드를 정벌할 때에 쫒겨났던 [[애설레드 2세]]를 다시 잉글랜드로 들여보내 크누트와 맞서싸우게 했던 인물이 바로 올라프 2세였기 때문. 게다가 1024년 크누트 대왕이 올라프 2세에게 자진 복속되어 자신의 가신 자격으로 노르웨이를 다스리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자 올라프 2세는 이를 칼같이 거절했다. 올라프 2세를 더이상 놔둘 수 없었던 크누트 대왕은 노르웨이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뇌물을 뿌려 가신들이 올라프 2세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드는 한편, 1028년부터는 아예 50여 척의 덴마크 함대를 이끌고 노르웨이 해안가 일대를 정벌했다. 올라프 2세가 노르웨이인들로부터 별 인기가 없었던 것도 크누트가 쉽게 노르웨이 정벌을 할 수 있는 큰 요인이었다. 올라프 2세는 오슬로피요르드로 도망쳤고, 크누트는 함대를 이끌고 해안 지방을 중심으로 순회하며 수많은 족장들에게 충성 맹세를 받아냈다. 결국 올라프 2세는 변변찮은 싸움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몇 달만에 스웨덴으로 달아나야 했다. 올라프 2세는 1030년에 다시 귀환하려 시도는 해봤지만 노르웨이인들이 그의 귀환을 원치 않았고, 결정적으로 스티클스타드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비참하게 사망했다. 참고로 헬가 전투에서 스웨덴 함대를 꺾은 이후 크누트 대왕은 [[스웨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CNVT REX SW', 즉 '스웨덴의 크누트 왕'이라는 동전을 대놓고 주조하면서 외국에 자신이 스웨덴 국왕이라는 걸 강조하려 시도했고 실제로도 스웨덴 땅 일부는 지배했다. 그러나 전국을 지배했던 잉글랜드와 노르웨이와는 달리 스웨덴은 확고히 장악하지 못했던 것이 거의 확실하고, 스웨덴을 실제로 다스렸다기보다는 그냥 자신의 위엄을 내세우기 위해 붙인 타이틀이라는 게 더 합리적이다. 스웨덴인들은 끊임없이 크누트 대왕의 골머리를 썩혔고 1030년에 올라프 2세가 노르웨이를 되찾기 위해 돌아올 때 군함을 지원해주기까지 했다. 그 외에도 크누트 대왕은 [[로마]]에서 돌아오자마자 대군을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쳐들어가 봉신국으로 삼았고 [[아일랜드섬]] 일부까지도 영향력을 미쳤다. [[더블린]]이 북해 제국의 영향권 아래로 편입되었고 [[웨일스]]까지도 반쯤 속국으로 만들어버렸던 것. 그래서 크누트 대왕이 죽기 직전 전성기의 북해 제국은 [[노르망디]], [[폴란드]]와 동맹국이었으며 웨일스, 스코틀랜드를 속국으로 두고 본토가 덴마크, 잉글랜드, 노르웨이, 스웨덴에 걸쳐있는 거대한 크기의 제국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